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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중국기녀열전①] 중국 문학을 울린 기녀의 슬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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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대 화가가 그린 소소소


용모가 출중한데다 문학적 재능 또한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가 지은 '저는 유벽거를 타고, 그대는 푸른 말을 탔도다. 어디에서 마음을 맺어야 하나? 서릉의 송백 아래로다.(妾乘油壁车,郎跨青骢马.何处结同心,西陵松柏下)'라는 시는 훗날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시다. 유벽거는 그가 즐겨 타고 다녔던 수레로 외관과 휘장을 화려하게 치장했다.


▲ 6각정과 소소소의 무덤. 무덤 봉분은 시멘트를 바르고 노란색 칠을 했다.


소소소는 항저우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부모를 여의고 기생이 됐다. 명기(名妓)로 이름을 날리던 소소소는 명문가의 아들 완욱(阮郁)을 처음 만나 첫눈에 반했다. 불행히도 난징(南京)에 있던 완욱의 아버지가 아들이 기생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시켜 아들을 난징으로 돌아오도록 했다. 완욱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소소소는 급기야 병이 나 몸져누웠다. 이 때 포인(鲍仁)이라는 가난한 한 서생을 알게 됐고, 포인을 보고 소소소는 완욱이 생각나 관심과 사랑을 쏟았다. 이 덕분에 포인은 장원 급제했고 임지로 부임하는 도중에 소소소는 꽃다운 나이 19세에 세상을 떠났다. 포인은 소소소를 항저우 시후(西湖)의 시링차오(西泠桥) 옆에 묻었고 소소소를 기리기 위해 묘 앞에 '전당소소소지묘(钱塘苏小小之墓)'라는 비석을 세웠다. 


▲ 시후(西湖) 시링차오(西泠桥)의 ‘모재정(慕才亭)’과 소소소의 무덤


후대의 사람들은 그녀의 재주를 앙모해 청나라 건륭 황제 때에는 묘 위에 정자를 세웠다. 그 후 여러 차례 정자가 훼손돼 1988년 이곳에 다시 6각형의 정자가 지어졌다. 중국인은 그의 재주를 추앙한다는 의미에서 ‘모재정(慕才亭)’이라 이름을 붙였다. 현재 볼 수 있는 정자는 2004년 항저우시 정부가 각계의 의견 수렴과 고증을 통해 원래의 자리에 묘와 정자를 세운 것인데, 정자의 높이는 5.5m, 묘의 직경은 2.6m, 묘의 높이는 0.8m다. 


▲ 전당소소소지묘(钱塘苏小小之墓)라 쓰여진 비석


▲ 소소소묘 앞의 표지석

소소소와 관련된 시문, 소설, 희곡은 매우 많다. 백거이(白居易), 이하(李贺) 등 많은 시인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안고 세상을 떠난 애절함을 처연하게 묘사했는데, 이중 이하의 제소소소묘(题苏小小墓)라는 시가 대표적이다. 제소소소묘의 작품 구절마다 사랑을 꽃 피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소소소에 대한 아쉬움과 서글픔이 교차하고 있다.

중국 언론 웨이라이망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예로부터 기녀를 천하고 불결하다고 여겼지만 소소소처럼 문예에 출중한 기녀의 경우 중국 문화 발전에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많은 고대 시 전문가는 "중국 고대의 시와 사(词)를 살펴보면 기녀들의 기여도를 알 수 있다"며 "전당시(全唐诗)에는 기녀의 시 136편이 기록돼 있고, 전당시에 수록된 시가 중에 기녀와 관련된 시, 사가 매우 많다"고 말했다. 이어 "이를 통해 기녀 자체가 이미 문인이 창작할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최예지 기자 rz@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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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봉황망코리아 ㅣ 차이나포커스 https://goo.gl/lLXc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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