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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중국기녀열전②] 기생의 `일편단심`...中 소설의 모티브 된 `피로 물든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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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망국(亡國)의 설움 속에서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한 중국 한 기생의 스토리가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 이향군(李香君)


이향군(李香君)은 명나라 말기의 명기로 친화이허(秦淮河)지역의 절세 기생(秦淮八絶) 8명 중 한 사람이다. 절세 기생은 명나라 말 격렬한 정치 투쟁과 한족·만주족 간의 민족 투쟁 속에 지조를 보였던 이향군, 유여시(柳如是), 마상란(马湘兰) 등 8명의 기생을 가리킨다. 중국 언론 웨이라이망(未来网)은 미모와 지성을 겸비하고 민들레 같았던 이향군을 소개했다.


▲ 미향루(媚香楼)


이향군은 무관 출신 집안에서 태어나 양모(養母)의 손에서 길러졌다. 본래 성은 오(吳)씨였지만 양모의 성을 따라 이(李)씨로 바꿨다. 그림, 거문고 등 여러 가지에 능통했던 팔방미인 이향군은 장쑤(江苏)성 난징(南京)의 명기(名妓)가 됐다. 이후 친화이허에 있는 미향루(媚香楼)의 기녀로 유명세를 떨쳤다. 


▲ 후방역(侯方域)


그가 19세가 되던 해 8대 재사(才士)였던 후방역(侯方域)을 알게 돼 결혼에 이르렀다. 


▲ 이향군(李香君)이 살던 집


▲ 이향군(李香君) 생가의 정원


▲ 이향군(李香君)이 후방역과 함께 살았던 집 내부


행복은 길게 가지 못했다. 이향군과 후방역이 행복한 나날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청나라가 쳐들어왔다. 청나라 군대를 막기 위해 떠난 후방역은 모함을 받아 도망자 신세가 됐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였던 이자성(李自成)은 베이징을 함락하고 이향군에게 다른 사람의 첩이 되기를 강요했다. 이향군은 그 뜻을 따르지 않았고 이자성은 홧김에 이향군을 기절시켰다. 이 때 이마를 다쳐 피가 나면서 후방역이 떠나기 전에 준 부채가 피로 물들었다. 이 부채에는 '좁은 골목 경사길 옆의 붉은 누각에서 부평거(富平车)를 탄 왕손(王孙)을 처음 봤다. 목련나무는 봄날 시냇물을 마시고 동쪽 바람은 복숭아꽃에 미치지 못했네(夹道朱楼一径斜,王孙初御富平车. 清溪尽种辛夷树,不及东风桃李花)'라고 적혔다. 


▲ 이향군(李香君)의 석상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이향군과 후방역은 재회를 하고 다시금 사랑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 도화선(桃花扇) 경극



청나라 희곡가인 공상임(孔尙任)은 이 실화를 바탕으로 부채 이름을 딴 '도화선(桃花扇)'을 10년간 집필했다. 피로 물든 부채는 신분의 차이와 망국의 처지 때문에 끝내 이뤄지지 못한 사랑을 상징하며 비극의 아픔을 극대화시킨다. 도화선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담았지만 명나라의 멸망에 대한 통한도 녹아 든 청나라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를 받는다.

도화선은 세계에서 낭만적인 비극으로 손꼽히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중국에서 4대 비극으로 유명하다. 중국 오페라인 경극(京剧), 지방극, 영화, 드라마로 각색돼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장쑤성 난징시에는 이향군의 고거(故居)가 있다. '미향루'라고 불리는 건물로 명·청나라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향군의 당시 생활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매년 중국인들은 미향루에 모여 이향군을 기린다.

중국 언론 웨이라이망에 따르면 이향군처럼 문예에 출중하고 사랑을 지켰던 기녀가 드물었다.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최예지 기자 rz@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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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봉황망코리아 ㅣ 차이나포커스 https://goo.gl/Mb3C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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