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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중국부자열전⑪]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中 청나라 상인 `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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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치(王炽)


왕치(王炽)는 청나라 거상(巨商)이지만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라면 아낌없는 물질적 지원을 했다. 당시 최고의 상인이었던 호설암(胡雪岩)을 능가할 정도로 유명하다. 


▲ 왕치(王炽)


왕치(1836년~ 1903년)는 호설암과 함께 상인이라는 신분으로 모자에 붉은 산호를 달 수 있는 관직을 받아 홍정상인(红顶商人)으로 불렸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THE TIMES)는 왕치를 19세기 세계 4위의 갑부로 선정했는데 이는 동양인으로서 최초였다.


▲ 왕치(王炽)의 조각상


왕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자가 아닌 자수성가형 상인이었다. 이하(李贺)의 ‘전왕: 왕치대성인생방략(钱王:王炽大成人生方略)’에 따르면 왕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형을 잃고 힘들게 살다가 어머니의 마지막 예물을 팔아 마련한 은 20냥을 갖고 장사에 뛰어들었다. 기개가 넘치고 영리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은 100냥 이상을 벌게 됐다. 

대상(队商, 상인집단)을 거느리게 되면서 장사에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 충칭(重庆)에 오늘날의 은행인 ‘천순상전장(天顺祥钱庄)’ 설립하고 발전시켰다. 쓰촨(四川)·구이저우(贵州)·윈난(云南) 지역의 무역업의 강자가 됐다. 청나라 동치(同治) 11년에 왕치는 쿤밍(昆明)에 동경풍(同庆丰)이라는 상점을 열어 금융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광저우(广州)·장시(江西)·한커우(汉口) 등 15개 성과 지역·베트남·말레이시아에 잇달아 지점을 설립해 명실상부한 대형 은행그룹으로 거듭났다. 둥촨(东川)과 거지우(个旧)의 구리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주변 지역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힘쓰고 가난한 학생을 위해 장학재단 성격의 ‘흥문당(兴文当)’을 설립하기도 했다.

왕치는 돈을 잘 벌었을 뿐만 아니라 돈을 잘 쓸 줄도 알았다. 광서(光绪) 26년, 산시성(陕西省)과 산시성(山西省)에 가뭄이 들자 그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은 2만냥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팔국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해 광서제(光绪帝)와 자희태후(慈禧太后)가 황급히 시안(西安)으로 도망을 갔을 때도 왕치는 군말 없이 도피 자금을 지원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당시 천순상전장 덕분에 청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정치가 이홍장(李鴻章)도 그의 재산을 가리켜 ‘청나라의 국고와 같다’는 찬사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올 정도다.

훗날 청나라는 왕치에게 ‘급공호의(急公好義, 대중의 이익을 위해 힘쓴다)’라는 편액과 일품 홍정상인(一品红顶商人)의 작위를 하사했다. 왕치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일품 홍정상인이 되어 ‘이품 홍정상인’인 호설암의 명성을 능가했다.


▲ 삼대일품봉전(三代一品封典)



윈난성 훙허하니족이족자치주(红河哈尼族彝族自治州) 미러(弥勒)현에는 왕치의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미러현에서 유명한 동굴인 바이룽둥(白龙洞)에 인접해 있고 고택 안에는 삼대일품 작위비석이 보존돼있다.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최예지 기자 rz@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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