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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한중수교 25주년] 북방외교의 화룡점정, 韓中수교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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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정책 추진과 관련, 여권 내부의 지나친 경쟁과 함께 수순을 둘러싼 이견도 심심치 않았다. 성과가 가시화 되면서 정책방향 자체에 대한 반대 목소리는 잦아들었으나 중국을 우선하느냐, 소련을 우선하느냐를 놓고는 논란이 있었다. 주로 북한과 연관된 것으로 과연 어느 쪽이 효율적이냐는 충돌이었다. 노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을 비롯한 보수 쪽에서 이를 집중 거론했는데 수교의 수월성 등에 미루어 소련을 우선하는 게 낫다는 것으로 낙착됐다. 

교역 증가 속도 등을 보면 중국과 수교가 시급하지만 북한과의 특수관계인 중국을 서두르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제 예상보다 훨씬 시일이 지나, 한소 수교가 있은 지 2년이 되어서야 한중 수교가 성사됐다. 

박철언이 YS의 일격을 받고 무대 전면에서 일단 사라진 뒤 북방외교는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의 청와대 기획, 이상옥 장관의 외무부 현장 담당 형태로 추진됐다. 안기부는 막후 지원하는 모양새였다.

‘동해사업’으로 명명된 초기 외무부 TF 팀은 권병현 본부대사와 신정승 동북아2과장(후일 주중대사) 등 소수로 짜였다. 여기에 변종규 비서관 등이 가세했지만 보안을 이유로 한 청와대와 외무부의 경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이 외무부 정통 관료가 아닌 민병석 비서관을 고집한 이유 등도 외무 관료를 들일 경우 친정인 외무부를 의식한 정보 유출이 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1987년 덩샤오핑과 김일성이 베이징에서 회담을 갖고 있다. / 사진출처=바이두(百度)


북한에 입장에서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게임이었지만 마지막 남은 중국을 잡으려는 시도는 더욱 집요했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하지만 험악했을 뿐 실제 위해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엔 북한의 처지를 이해는 하지만 돌발 사태로 판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한 중국 당국의 치밀함이 단단히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중국-대만과 斷交’ 수용으로 쉽게 막내린 동해사업

북한은 1991년 5월 평양을 방문한 리펑 총리의 ‘국제사회의 현실을 인정하라’는 권유를 받아들여 유엔 가입 신청을 하겠다는 5·28 외교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중 수교 불발 기대를 완전히 접지는 않은 듯하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결국은 ‘국가인정→수교’라는 단계를 밟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음에도 그랬던 것은 그만큼 절실하다는 절규일 게다. 


▲ 1991년 남북 고위급회담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중국의 실력자 덩샤오핑 군사주석이 남북 유엔 동시가입(9월17일) 1개월 뒤인 10월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한중 수교 구상을 알린 이후에야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직시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10월22일)에 응하고 12월13~15일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기본합의서)’에 서명한 것도 대세를 수용한 결과라고 파악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어 열린 핵 문제에 대한 남북접촉에서 미군 보유 전술핵 철수까지를 포함한 한반도 비핵화가 합의되고 12월31일 공동선언이 가서명됐다.

◇성급했나?…엇갈리는 미군 전술핵 철수 합의 평가

얼마 전 주한 미국 대사와 주한 미군 사령관이 전술핵 보유 실태를 노 대통령에게 보고한 바 있다. 대통령께 그간 NCND(긍정도 부정도 않는 대응) 입장을 취해왔는데 굿이 전술핵 철수를 선언문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진언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어차피 알려질 일이니 분명히 하는 게 낫다며 뿌리쳤다. 유럽에서의 핵철수 등에 비춰 철수를 시간문제라고 인식한 판단인 듯하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렀음에도 한중간 수교는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다. 북한의 진정을 기다리는 것인지 북한에 대한 배려인지 중국의 만만디는 수개월 지속됐다. 1992년 4월 첸지천 외교부장은 유엔아태지역 경제협력이사회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한 이상옥 외무장관에게 수교를 위한 실무회담을 제의했다. 전제는 ‘비밀’. 북한을 의식한 게 분명했다. 

5월과 6월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진행된 실무교섭이 마무리됐다. 이미 뼈대가 만들어진 상태라 밀고 당길 대상이 많지 않았기에 난관은 별로 없었다. 민감한 사안인 ‘하나의 중국 정책’, 즉 대만과 단교(斷交)도 마찬가지였다. 불가피한 것으로 이미 결론, 수용 방침을 정했었기 때문이다. 기본 수교 본회담은 7월29일 베이징에서 열렸다. 쉬뢴신(徐敦信)중국 외교부 부부장과 노창희 외무차관간이 수교합의문에 가서명했다. 

남은 숙제는 한중 각자의 ‘옛 동지’ 대만과 북한에 수교 합의 사실을 통보하는 일. 이 대목에 관한 한 한국은 씻기 어려운 과오를 범했다. 중국과의 ‘비밀 엄수’ 약속에 얽매여 불필요한 감정까지 자극하는 우를 범했다. 

반면 중국은 양상쿤이 평양을 방문, 북한을 다독였고 회담 완전 타결 2주 전에는 첸지천 외교부장이 평양을 방문해 ‘한중 수교 시기가 성숙했다. 북한의 이해와 지지를 구한다’는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친서를 전달했다.


▲ 1990년 양수룽(梁肅戎) 대만 입법원장이 한국을 찾아 노태우 대통령과 환담을 진행했다.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대만에 관한 한 한국은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다. 1990년 노 대통령은 대만 국회의장 격인 양수룽 입법원장 일행의 예방을 받고 ‘새 친구를 사귀어도 옛 친구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게 도리’라는 말로 상대를 안심시켰다. 단교만은 없으리라고 믿기에 충분했다. 

수교 원칙에 합의하고 실무회담에 착수하던 1990년 5월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의 특사자격으로 예방한 장옌스(將彦士)비서장이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더라도 대만과 수교를 1년 연장해달라고 요구하자 한중 수교설을 부인하면서 경제·무역상 최혜국대우를 약속했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한국 외무공무원들

그래놓고 수교 협상을 완전히 마친 이상옥 장관은 8월15일 광복절 기념 리셉션장에서 만난 진수지(金樹基) 대만대사에게 운을 뗀다. ‘미국에 거주하는 딸 결혼식 참석을 위해 잠시 출국한다’는 진 대사의 말에 ‘여러 상황을 볼 때 한국을 비우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답변했다. 이게 외무부가 계획했던 1차 통보 전 베푼 그나마 ‘선심’이다. 그리고 사흘 뒤 진 대사를 호텔방으로 불러 수교 사실을 알렸으니 대만의 배신감은 짐작된다. 보안을 당부했는데 본국에 보고, 누출되게 만들었다고 투정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추태다.


▲ 한국·대만 단교 기자회견 당시 진수지 주한 중화민국대사 / 사진출처=MBC 캡쳐


어떤 변명으로도 부족한, 북방외교의 최대 흠결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중 수교의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국인은 없겠으나 이런 파렴치에 동의하는 이는 드물 터다. 그리고 다시 사흘 뒤 진수지 대사를 외무장관실로 초치한 이 장관은 공식 단교 문서를 전달하며 사흘 이내에 대사관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8월24일 오후 4시 청천백일기 하강식을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제1호 재외공관’은 사라졌다. 대만 친구가 얼굴에 침을 뱉었지만 가만히 있는 게 고작이었다는 한 사업가의 독백은 지금도 맴돈다.

‘중국과 비밀 유지를 약속했다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해보라. 인격이 있듯이 나라에도 국격이 있는데. 중국도 신의를 지키려는 상대를 존중할 것이다’는 의견을 외무부측에 전했지만 단호했다. 보안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건 정말 아니다. 대만은 고사하고 중국에 조차 면목이 없다. 중국이 보안 약속을 지켰다고 우리를 과연 평가해줄까? 그렇다면 의리를 지킨다는 다른 측과의 약속은?


▲ 1990년 노태우 대통령과 진수지(金樹基) 신임 주한 대만 대사 등 대만 대사관 관계자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1990년 3월 서울에 부임한 진수지 대사가 우리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신임장 제정이 끝나면 청와대 앞뜰에서 의장행사를 갖는 게 관례다. 그런데 행사를 주관한 외무부 의전실이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다. 행사 진행 중 대만 국가가 아닌 ‘대만 올림픽가’를 연주했다. 안색이 변한 진 대사에게 단단히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북방외교에 직접 관여했던 이들의 이런저런 회고다. ‘대만 올림픽가’ 소동의 책임자인 박 모 의전장은 주미 대사를 지냈다.

[봉황망코리아차이나포커스] 특별취재팀 kovap2@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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