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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중국부자열전⑨] 中, 사치의 끝을 보여준 `부자의 대명사` 석숭(石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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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화가 화암(华嵒)이 그린 금곡원(金谷园)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석숭(249년~300년)은 중국 서진(西晋) 시기의 문인이자 관리다. 귀족의 자제와 함께 시를 짓고 노는 '금곡이십사우(金谷二十四友)' 중 한 명이었다. 

'진서·석숭전(晋书·石崇传)'에 따르면 석숭은 서진시기의 표기장군(骠骑将军, 군대를 이끄는 장군 중 하나)이었던 석포(石苞)의 아들이다. 항해와 무역으로 돈방석에 앉아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부자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생각이 남달랐으며 담력이 컸다. 서진의 무제(武帝) 때부터 혜제(惠帝) 때까지 여러 벼슬을 했다. 허난(河南)성 난양(南阳)시에서 지방관리인 자사(刺史)로 지내면서 큰 부자가 됐다. 진서에 따르면 '형주(現 난양시)에서 멀리 가는 상인을 위협하여 재물을 모았다(在荆州,劫远使商客,致富不赀)'고 기록돼 있다. 


▲ 풍류를 즐기는 석숭(石崇)의 모습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석숭의 사치스러운 행동은 많은 역사 자료를 통해 볼 수 있다. '세설신어(世说新语)' 등 관련 자료에 따르면 석숭은 화장실까지 휘황찬란하게 만들었다. 향수, 방향제를 비치해놓고 하녀 10여 명이 화장실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석숭의 친한 친구 유식(刘寔)가 그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화장실을 보고 "침실에 잘못 들어간 것 같았다"고 말했다. 


▲ 녹주(綠珠)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석숭의 별장도 유명하다. 녹주(綠珠)라는 애첩을 위해 금곡원(金谷园)이라는 거대한 별장을 만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재산이 국가 재산보다 많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진무제(陈武帝)의 외숙인 왕개(王恺)와 부를 다투었는데, 항상 이겼다. 석숭과 왕개의 사치 경쟁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왕실과 관료들의 부패스런 생활상을 잘 보여줬다. 

300년, 혜문황후(惠文皇后)를 제거하기 위해 조왕(赵王) 사마륜(司马伦)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석숭은 황문랑(黄门郎) 반악(潘岳), 제왕(齐王) 사마경(司马耕) 등과 힘을 합쳐 대항했지만 패했다. 삼족이 해를 당하고 그의 자산은 관부(官府)에 몰수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최예지 기자 rz@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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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봉황망코리아 ㅣ 차이나포커스 https://goo.gl/E5ug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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