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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규방 여인'에서 '제 1의 부자'까지, 중국 여장부 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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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영(周瑩) ⓒ 봉황망(凤凰网)


타고난 자질이 총명한 ‘규방 여인’에서 갑부인 ‘섬서 제일의 부자’가 되기까지 주영(周瑩)은 당시 남자들이 주도하던 상권에서 여러 차례 굴곡을 겪었다. 서태후는 그를 양녀로 삼았고 중국인들은 그녀를 ‘여상성(女商聖, 여상인 성인)’으로 받들었는데 그의 전설적인 일생은 진상의 대의와 신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 드라마 ’나년화개월정원(那年花開月正圓)’에서 쑨리(孫麗)가 청나라 말기 진상(秦商·산시(陕西)상인) 저우잉(周瑩· 주영)을 열연했다. ⓒ 드라마 나년화개월정원 스틸컷



최근 중국 시청자들은 드라마 ’나년화개월정원(那年花開月正圓)’에서 쑨리(孫麗)가 열연한 청나라 말기 진상(秦商·산시(陕西)상인) 저우잉(周瑩· 주영)에 푹 빠져있다. 많은 이들이 나년화개월정원은 모두 허구라고 생각하지만 역사적으로 주영이라는 여인이 정말 실제로 있었고 그녀의 일대기는 드라마에서 보여진 모습보다 훨씬 전설적이다. 

섬상(陕商)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진상은 중국에서 지역, 친족 관계에 따라 가장 일찍 출현한 상인그룹으로 여겨진다.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차마고도(茶馬古道)’,‘주서구(走西口·만리장성 서쪽 지역으로 나간다)’처럼 누구나 아는 단어들은 모두 진상에서 기원한 것으로 주영은 진상 중 전설적인 여인으로 손꼽힌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한 ‘규방 여인’에서 ‘섬서제일의 부자’가 되기까지 그녀는 당시 남자들이 주도하던 상권에서 여러 차례 굴곡을 겪었다. 서태후는 그녀를 양녀로 삼았고 현지인들은 그녀를 ‘여상성(女商聖,여상인 성인)’으로 받들었는데 그녀의 전설적인 일생은 진상의 대의와 신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 과부가 된 신혼의 주영, 집안 위기에서 임명을 받아 


▲ 주영은 오빙(吳聘)과 결혼했다. ⓒ 드라마 나년화개월정원 프로필 사진



드라마에서 주영은 양부를 따라 기예를 팔아 유랑생활을 한 강호여인이지만 역사상 그녀는 실은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대갓집 규수이었다. 1868년 주영은 산시성 산위안(三原)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 주해조(周海潮)는 당시 유명한 부상(富商)이었다. 17살 때 주영은 산시성 징양(涇陽)현의 갑부인 소금 장수 오울문(吳蔚文)의 독자 오빙(吳聘)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얼마 안 돼 주영의 시아버지와 남편은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오씨 집안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남편 슬하에 아들이 없어 젊은 주영이 오씨 집안의 유일한 계승자가 됐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태평천국(太平天國)운동과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침략 때문에 시국은 매우 불안했다. 이런 시기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 많이 쉽지 않았다. 특히 여자 상인에게 큰 용기를 요구했다. 그래도 주영은 의연히 집안의 진흥을 책임졌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남겨둔 상호(商號), 상점과 재산을 물려받은 그녀는 타고난 상업적 두뇌를 통해 일련의 과감한 개혁을 실시했다.

◇ ‘수완을 발휘’해 위엄을 세우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한 ‘규방 여인’에서 갑부인 ‘섬서 제일의 부자’가 되기까지 그녀는 당시 남자들이 주도하던 상권에서 여러 차례 굴곡을 겪었다. 서태후는 그녀를 양녀로 삼았고 현지인들은 그녀를 ‘여상성(女商聖, 여상인 성인)’으로 받들었는데 그녀의 전설적인 일생은 진상의 대의와 신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주영이 오(吳)씨 집안 사업을 물려받았을 때 오씨 상업 절반을 차지하던 성도(成都) 산화약재점(山貨藥材店, 토산품 약재점) ‘천화총호(川花總號)’ 담당자와 양주(揚州) ‘유륭전(裕隆全)’ 염무(鹽務) 본점 담당자는 원래 주인이 세상을 떠난 틈을 타 상점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었다. 

이 사실을 안 주영은 조심스럽게 계획을 짜서 선제공격을 가했다. 특히 성도 ‘천화총호’ 담당자와의 싸움에서 그녀는 자신의 ‘수완’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그녀는 증거를 수집하면서 성실한 직원들을 상점 관리층으로 발탁해 ‘천화총호’ 담당자가 내부에서 고립무원 처지가 되도록 했다. 이어 그녀는 수집한 증거를 현지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 붙였으며 순식간에 ‘천화총호’ 담당자는 외부 여론의 지지를 잃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현지의 관아에 뇌물을 주어 법률적으로도 든든한 방패를 마련했다. 

다른 마음을 품었던 두 총책임자는 주영이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힘 한 번 못 써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기타 총책임자도 이 어린 아가씨의 수완에 겁을 먹었으며 이 때부터 그녀를 위해 성실히 충성을 다했다. 이 때부터 주영 주변엔 수십 명의 능력 있는 책사가 늘 함께 했으며 그녀는 그들을 위엄과 인자함으로 대하며 훗날의 찬란한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 주식 인센티브제, 양로연금의 효시를 열다 

주영은 위엄을 세우는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원들 급여를 20% 인상하고 연말상여금제도를 만들었다. 

이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수입과 점포 이익을 서로 연계해 오늘날의 주식 인센티브 제도와 유사한 ‘제도개혁’을 실시했다. 예를 들어 직원들 연봉이 1년에 20량이면 그 중 10량만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10량은 주식으로 적립하는 ‘양봉음봉제(陽俸陰俸制)’라는 제도를 추진했다. 즉, 살아있을 땐 일을 못하면 퇴직금을 받을 쓸 수 있으며 죽은 후엔 이 퇴직금을 가족들이 수령할 수 있는 것이다. 주영의 방법은 즉시 효과를 보였다. 상점 직원들은 적극적으로 장사에 임했고 점포 사업도 나날이 발전했다. 직원들은 예전에 그녀에게 가졌던 의심을 일순간에 해소하고 모두 전심전력으로 이 새로운 사장을 도와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 시장 규율을 이용해 가업을 다시 일으키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으로 갑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시장 규율을 잘 파악해서였다. 당시 오씨 집안의 산업은 면화가 주업이었지만 면화의 생산량은 날씨에 좌지우지되어 늘 ‘3년 풍년, 1년 흉년, 2년 평년(平年, 수확이 보통인 해)’이었다. 풍작이면 가격이 내려갔고 흉작이면 가격이 올라가서 면화업계와 면화농가는 매우 긴장된 관계에 있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이풍보겸 (以丰補歉, 풍작으로 흉작을 보충하다)’을 제안했다. 즉, 면화가격이 낮을 땐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매수하여 면화농가로 하여금 면화가 부족하고 면화가격이 높을 때 그녀에게 가격 할인과 안정된 물건 공급을 해주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이렇게 주영은 면화 업계전체를 독점했다. 겨우 7년만에 오씨 집안 산업은 매년 3,000여 담(擔, 100근이 1담) 면화를 매출하던 것에서 순식간에 매년 11만 담을 매출하게 되었으며 관중(關中, 지금의 산시성) 지역에서 가장 큰 면화 매매 업체로 부상했다. 

오씨 집안의 상업판도는 주영의 운영 하에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가장 전성기일 때 상점이 전국에 골고루 퍼져 전국에 108개 분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염업, 비단, 면화, 면포, 약재, 차 등 분야의 사업을 했다. 민간에는 심지어 이런 말이 나돌 정도였다. "오씨 집안 직원이 전국 각지에 출장가면 다른 집 밥을 먹지 않고 다른 점포에 묵지 않는다” 

◇ 베풀기를 즐기고 대의명분을 잘 안다

주영은 위세가 등등한 여진상이면서 공자사당을 세우고 의학을 운영하며 이재민을 구제하고 구거를 수리하는 등 선행을 즐긴 선인(善人)이기도 했다. 국난이 눈앞에 닥쳐 대의명분을 잘 안 그녀는 세인의 존경을 많이 받았다. 


▲ 서태후 ⓒ 봉황망(凤凰网)



1900년 주영은 중국을 침략한 8개국 연합군을 피하러 시안(西安)에 피난하러 온 서태후에게 백은(白銀) 10만 량을 바쳤다. ‘신축조약’이 체결된 후, 그녀는 다시 청정부에게 백은 30만량을 바쳤다. 서태후는 감동을 많이 받아 주영을 양녀로 삼았고 또한 그녀를 ‘일품고명 부인(一品誥命夫人)’으로 하사했다.

주영이 전후로 청정부에게 바친 백은 40만 량은 그 당시 기름진 밭 8만 묘(지금 베이징 동성구(東城區)와 서성구(西城區)의 총면적에 해당)를 살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주영은 돈을 벌기만 한상인이 아니라 조국과 사회에게 모두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1910년 전설적인 여상인 주영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 향년 42세이었다. 죽기 전에 그녀는 몇 십 년간 심혈을 기울여서 모은 거액의 재산은 모두 하인에게, 토지는 촌민들에게 나누었다. 주영이 출상(出喪)한 날, 그녀의 영구를 묘지로 보내러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이 8만 명에 이렀다. 이는 관중 지역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다고 할 수 있었다.

작가 이문덕(李文德)는 "주영은 중국 상업사상 속되지 않은 업적을 취득하고 나라에게 큰 공적을 세운 유일한 여상인입니다. 그녀의 미덕과 지혜는 개인의 인격적 매력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진상 지혜의 결정이라서 전체 산시(陝西)인의 자랑입니다”라고 평가했다.

제휴매체 중국 ‘금교(金桥)’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출처: 봉황망코리아 ㅣ 차이나포커스  https://goo.gl/q6Y3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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