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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이름도 없고 지도에도 없는 중국의 비밀 도시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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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비밀 도시 ‘404’ ⓒ 봉황망(凤凰网)

 

[봉황망코리아 권선아 기자] 중국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지도에도 표시돼 있지 않은 도시가 하나 있다. 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이 도시의 코드명은 ‘404’다.

여타 도시처럼 번듯한 이름 하나 갖지 못했다. 단지 404라고 불릴 뿐이다. 고유한 자동차 지역번호도, 우편번호도 없다.

하지만 다른 도시처럼 404에도 토지국, 사회보험국, 방송국, 신문사 등 행정기관은 모두 갖추고 있다. 404는 도시 면적이 4㎢에 불과한 작은 지급시(地级市∙중국의 제2급 지방행정단위)로 주민들의 거주지 면적은 고작 2㎢ 미만이다.

이곳이 사람들에게 가리워진 이유는 따로 있다. 과거 중국 정부는 이곳에 첫 군용핵 원자로를 세웠다. 문화대혁명 시기 404는 중국 핵공업의 전초기지였으며 국가 기밀 지역이었다. 따라서 모든 지도상에서 이곳은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인근 주민들조차 이곳을 국가가 지정한 탄광지로 착각할 정도였다.

 

▲ 과거 404에 세워진 모택동 동상 앞에서 주민들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 봉황망(凤凰网) 

 

사진으로 보면 404는 보통의 북방 소도시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사막에 어떻게 호수가 있고, 공원이 있고, 산이 있겠는가?

사진 속 호수는 인근 치롄산(祁连山)에서 끌어다 온 물로 채운 것이다. 지하에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대한 핵 기지가 숨겨 있었다.

1958년 404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정부는 전국의 우수한 노동자들을 이곳으로 끌어왔다. 핵 전문가뿐 아니라 다양한 인재들이 몰려왔다. 예컨대 상하이의 최고급 요리사, 난징의 유명한 사업가, 각지의 기술공들이 모두 바로 이곳, 404로 달려왔다.

이들이 받은 목표는 단 하나였다. 모든 힘을 끌어모아 원자탄을 만드는 것. 404에는 슬로건이 하나 존재했다. 바로 ‘청춘을 다 바쳐 일하고 그 유산을 자손에게 물려주자’였다. 구호처럼 주민들은 3대에 걸쳐 이곳에 일생을 바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도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자급자족했다. 온갖 조미료를 제조해 음식의 맛을 살렸고, 아이스크림도 직접 만들어 먹었다.

 

▲ 404 공원 ⓒ 봉황망(凤凰网)

 

심지어 공원도 조성했다. 공원 한켠에는 몇몇의 우리를 세워 작은 동물원을 마련했다. 우리 안에는 곰, 사자, 공작새, 꽃사슴 등이 있었다.

환경은 열악했다. 사막 지형이다보니 항상 모래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자동차 유리마다 모래에 긁힌 자국으로 빼곡했다. 사람들은 바람에 날리는 직경 3~4cm의 돌을 피하기 위해 집 밖을 나갈 때면 항상 안전모를 썼다.

날씨는 지나치게 화창했다. 태양이 모래 위를 내리쬐면 노동자들은 뜨거운 열기에 더 빨리 지쳤다. 어쩌다 날씨가 흐리기라도 하면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는 것마냥 모두들 기뻐하곤 했다.

학교도 있었다. 초등학교의 경우 한 학년당 2개의 학급이 있었다. 한 반에 30명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업을 들었다. 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함께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친형제처럼 서로를 잘 알았다.

이곳 아이들은 타도시에 사는 아이들처럼 TV보기, 음악 감상 등을 할 수 없다. 노는 것이라고는 밤에 감자를 구워먹거나 별을 보는 게 전부였다.

새 옷을 사기 위해서는 차를 대절해야 했다. 100km를 꼬박 운전해서 가야 가장 가까운 시내에 도착할 수 있다.

범죄자를 심판하는 중급법원과 이들을 가두는 감옥도 존재했다. 간수는 범죄자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웃주민이거나 심지어 가족이기도 했다.

심각한 범죄 행위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한 주민이 당구장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기차를 타고 도주했지만 얼마 못 가 체포돼 마을로 끌려 돌아왔다. 404 중급법원이 열렸고 판사는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사형! 즉각 시행한다!” 범인을 트럭에 태워 사형장으로 향하는 동안 그의 목에는 판결이 적힌 패가 걸려 있었다. 1990년대였던 그때, 고대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다. 범인은 그날 총살형을 당했다.

 

▲ 지금은 폐허가 돼 버린 404의 한 초등학교 ⓒ 봉황망(凤凰网)

아이들이 404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바로 대학입시였다. 하지만 워낙에 세상과 등진 지역이다 보니 아이들은 제대로 된 수업을 받기란 녹록지 않았다. 교사들은 대부분 중졸이었다. 다만 404의 정치적 입지가 높아서 학생들의 대학 진학은 수월한 편이었다.

404가 세워질 때부터 정부는 핵전쟁의 위험을 고려했다. 그래서 지하에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404 지하에는 생산기지와 생활기지 등 여러 공간이 존재했다. 지상의 모든 학교는 만일에 대비해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입구를 뒀다.

하지만 정부의 우려와 달리 404에는 수십년 간 평화가 지속됐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 들어 갔고,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

언제까지고 침묵과 비밀이 계속될 것 같았던 404에도 돌연 끝이 찾아왔다.

404 지하 공간이 오랜 시간 끝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학교, 체육관 등 모든 게 다 붕괴됐다.

정부가 이 사실을 알고는 즉각 군대를 파견해 주민들을 이전시키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부랴부랴 이삿짐을 싼 다음 군용차를 타고 정부가 마련해둔 곳으로 떠났다. 매일 80대의 군용차가 세 차례 404로 들어왔다. 하루에 240여 가구가 마을을 빠져나갔다. 404는 반년 만에 아무도 살지 않는 황폐지로 변모했다.

 

▲ 중국의 비밀 도시 ‘404’ ⓒ 봉황망(凤凰网)

 

404 주민들은 새로운 도시에서 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404는 다른 도시처럼 자연적으로 발생한 지역이 아니라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성하고 외부로부터 고립시킨 도시였기 때문이다. 외지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불편함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중국의 비밀 도시 ‘404’ ⓒ 봉황망(凤凰网)

 

이제 404는 과거 속에만 머물게 됐다. 404의 여러 행정기관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처음부터 기록 하나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더 흐른다면 그곳에서 나고 자란 주민들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질 곳이 바로 404다.

sun.k@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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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봉황망코리아 | 차이나포커스 https://goo.gl/Lf6B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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