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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갑골 한 조각 배후의 전설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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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금교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기원전 1046년, 주무왕(周武王)은 상왕 주(紂)를 토벌해서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상나라의 도성은 폐허로 변해 버려서 역사에는 ‘은허(殷墟)’라고 불려왔다. 역대의 고전에는 ‘은허’란 단어가 항상 나타났는데 대체 이 은허란 곳이 어디에 있을까?

기원 1899년, 신비한 갑골의 나타남에 따라 그 위에 조각되어 있는 깊고 얕은 문자 부호들이 상나라의 왕조 비사를 하나씩 드러낸다.

갑골문은 중국에 최초의 계통적인 문자라고 할 수 있고 귀갑(거북의 등딱지)과 짐승의 뼈에 조각되기 때문에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상나라 멸망 후 이런 문자들은 갑골에 따라 오랫동안 땅 밑에 묻혀 있어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청나라 말까지 그들은 예사롭지 않은 방식으로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 우연히 발견된 ‘용골’

1899년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의 어느 날, 한 노인은 집에서 먹는 중약에서 우연히 뼛조각 몇 개를 발견했다. 그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뼛조각들을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이 위에는 왜 문자 부호가 있을까?” 이 노인은 광서 연간의 국자감(國子監) 제주(祭酒)를 담당하는 왕의영(王懿榮)이라는 사람으로 오늘날의 대학교 총장과 비슷한 관직에 있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고대문자에 대해 깊은 연구를 많이 해왔다. 이 뼛조각들의 이름이 ‘용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북경의 곳곳에서 고가로 용골을 사라고 명령했다. 어떤 골동품상들은 이 소식을 듣고 싸게 사들인 용골을 왕의영에게 비싸게 팔았다.

어느 날 밤, 왕의영은 등불 밑에 수집한 모든 용골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이를 분류해 정리했다. 금문, 대전(大篆), 소전(小篆)들과 비교했을 때 그는 이 문자 부호의 획이 가늘고 원형보다 사각형도 많고 스스로 계통이 되는 오래된 고대문자와 같음을 발견했다. 그는 이 문자 부호들이 금문보다 훨씬 오래된 문자로 형성된 시간은 전설 중에 존재했던 상나라 시기와 비슷하다고 추측했다.

비록 그 당시 왕의영이 이 갑골들의 중요한 의미를 분명히 하지 못했으나 그는 이 갑골들이 분명히 범상치 않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다. 

하늘에는 뜻밖의 풍운이 있기 마련이다. 1900년, 서구 열강들로 이뤄진 8개국 연합군이 북경성을 쳐부수자 왕의열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후에 사람들은 최초로 갑골문을 발견한 왕의영을 ‘갑골문의 아버지’로 불렀다. 

◆ 순탄치 못한 비밀의 탐지

나라도 집도 잃은 난세에 왕의영의 아들인 왕숭열(王崇烈)은 부친의 임종 유언에 따라 집에서 소장된 갑골 1500여 조각을 믿을 만한 사람인 부친의 좋은 친구이자 유명소설 <노잔유기(老殘遊記)>의 저자인 유악(劉鶚)에게 전했다. 

갑골을 전해 받은 유악은 연이어 골동품상에게서 수천 조각의 갑골을 수매해 전심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1903년 그는 5000여 조각의 갑골에서 문자가 비교적 많이 있는 1058조각을 골라서 <철운장귀(鐵云藏龜)>을 탁본했다. 이는 중국에서 공개된 갑골문을 보존하고 기록한 첫 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되지 않아 유악은 누군가의 모함에 빠져 타향으로 유배돼 객사했다. 그의 죽음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의 가족들은 수집된 갑골들을 몇 차례로 나누어서 팔아 버렸다. 이 갑골의 일부분은 영국인, 일본인에게 팔렸고 땅 밑에 묻힌 지 3000여 년이 넘은 갑골들이 해외로 유출될 위기에 직면했다.

그 때 갑골 연구에 중요한 인물이 한 사람 더 나타났는데 바로 나진옥(羅振玉)이었다. 그는 유악의 사돈으로 중국 고대 금석과 각명에 대한 깊은 연구를 했었다. 그는 유악의 집에서 처음 갑골을 보는 순간 이 신비스러운 문자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 갑골들이 어디서 출토되는지에 대해 가장 관심을 가졌다. 수년 간 끊임없는 탐방 끝에 나진옥은 어떤 골동품상의 입에서 소둔(小屯)이라는 지역명을 듣게 됐다. 소둔은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시 헝허(恒河) 강변에 있는 한 촌락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환수남(洹水南), 은허상(殷墟上)’이란 기록이 있는데 나진옥은 여러 고증을 거쳐 소둔촌이 바로 상나라 도성의 유전지인 은허의 소재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진옥의 노력은 그 당시 국민정부의 관심을 일으켰다. 1928년, 그 때의 중앙연구원의 위탁을 받은 고고학자들은 9년 간 15차례 안양 유적지를 발굴했다. 그 동안 여러 종류의 청동기, 옥기, 도자기를 다량 출토했는데 특히 갑골의 출토량은 15만 조각이 넘었다. 1936년 발견된 한 갑골 땅굴은 갑골의 발굴 역사상 가장 큰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전문가들은 놀랍게도 상나라 시대 황실의 문서 창고를 발견했다. 몸을 웅크리고 옆으로 누운 유골도 같이 발견됐다. 이 유골 아래는 아직 발굴 작업이 시작되지 않은 갑골층이었다. 전문가들은 이 유골의 주인이 생전에 황실의 문서 창고를 지키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 끝이 없는 비밀


▲ 사진출처 = 금교



갑골에 조각된 문자들은 3000여 년 전 상나라 역사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됐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신비스러운 문자를 ‘갑골문’이라고 명명하는 데 찬성했다. 갑골이란 단어에는 귀갑(龜甲)과 짐승의 뼈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부르기 간결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면 갑골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돼 있을까? 치지샹(齊吉祥) 중국국가박물관 연구원은 “이 갑골들은 상나라 시대 사람들이 점을 칠 때 쓰던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점치는 방식을 통해 하늘에 묻고 나서 하늘의 뜻으로 진행했다. 전쟁을 비롯한 큰 일은 물론이고 부녀들의 출산에 관한 것까지, 심지어 왕의 외출이 길한지에 대해서도 점을 쳐서 결정했다”고 분석했다.

상나라 사람이 점칠 때 우선 갑골을 한 조각 골라서 그 위에 질문 하나를 새겼다. 그러고 나서 갑골을 뒤집어서 그 뒷면에 잔금이 날 때까지 불로 굽고 잔금의 흐름과 길이에 따라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고 이를 또 다시 갑골에 새겼다. 일을 마친 후의 결과도 갑골에 남겼다.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에 기록된 내용은 매우 복잡하다. 대부분은 상나라 왕들이 날씨, 농업, 출정 등에 대해 점치는 내용이었다. 연구를 통해 상나라 무정(武丁)시기에 관한 내용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상왕 무정은 반경(盤庚)에 이어 상나라 제2대 왕인데 59년의 재위 기간 동안 빈번하게 출정해 한 때 쇠락했던 국가의 운명을 바꿔 놓았고 광활한 땅도 개척한 장본인이었다. 후대 사람들은 그가 재위한 기간을 무정중흥(武丁中興)이라고 불렀다.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은 상나라 시대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갑골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갑골에 아직 발견되지 못한 또 다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기사는 제휴매체 '금교'에서 발행한 기사입니다> 
정리: [봉황망 중한교류 채널] 권선아 기자 sun.k@ifeng.co.kr

출처: 봉황망코리아 ㅣ 차이나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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