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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고금을 초월한 ‘이카오(藝考, 예술계대학 입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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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기쁘고 즐거웠던 춘제(春節, 중국의 설날) 연휴에서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온 중국 예술계대학 입시생들은 치열한 ‘이카오시즌(藝考季)’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미래의 전도유망한 화가, 성악가, 배우가 되기 위해 그들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고 각 예술대학들로 바삐 달려가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미술학원(中國美術學院)만 해도 올해 6만5000명이 이카오에 참가한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예술계대학 수험생들이 건너는 외나무다리 길인 이 ‘이카오’의 길이 일찍이 2천여 년 전 이미 조용히 닦여지기 시작했다는 걸 아는 이는 단지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 이카오의 초기 형태

<주례∙보씨(周禮∙保氏)>에는 ‘국자(國子, 공경대부의 자제)를 양성하는 길은 육예를 교육하는 것이다(養國子以道, 乃敎之六藝)’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일찍이 주왕조 시기 예(藝), 악(樂), 사(射), 어(禦), 소(書), 수(數)의 ‘육예’ 교육이 매우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주 시기 설립된 향학(鄕學)에서 음악이 이미 정식으로 가르치는 학과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도 있다.


▲ 사진출처 = 금교


당나라 시기 음악이 발전하여 전례 없이 번영했으며 태상사(太常寺), 고취서(鼓吹署), 교방(敎坊)과 이원(梨園) 등 음악기관이 많았다. 이런 기관들은 음악, 춤 등 예술 전문인재의 양성을 담당하고 장기간 상비 악사와 단기 윤번 악사로 조를 나누어 양성했다. 각 조는 다시 배우는 악곡의 난이도에 따라 3단계로 나눠 교학을 진행했으며 연주, 공연 솜씨의 숙련 정도를 연간 심사하고 숙련 정도에 따라 성적을 누계해 우열을 평가하고 악사의 승진, 퇴출을 결정했다.

음악 외에 회화가 고대에도 매우 중요시되었다. 한나라 시기 한무제(漢武帝)는 학교제도를 널리 시행하고 관학[태학(太學), 군국학(郡國學)]과 사학을 결합해 예술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배우는 학원인 홍도문학(鴻都門學)을 설립했다. 이곳은 ‘서화’ 과정을 정식 개설했는데 이곳이 바로 중국 최초의 전문대학이자, 세계 최초로 출현한 문예전문학원이다.

수당 시기 정치, 경제, 문화가 전례 없이 번영했으며 예술교육도 중대한 발전을 이루었다. 궁정회화가 나날이 번창했으며 당명황(唐明皇)은 중국 최초의 한림원(翰林院)을 창립하고 예술인재를 널리 구해 그들에게 관직을 주며 궁정에 헌신하게 했다. 또한 일부 화가들을 집결시켜 강대한 궁정회화 역량을 구축하기도 했다.

◇ 송나라 휘종(徽宗)이 처음 창시한 ‘이카오’


▲ 송휘종 조길의 회화작품 <서학도> 및 그의 수금체로 쓰인 시문 / 사진출처 = 금교


송나라 휘종은 역사상 훌륭한 황제가 아니었고 심지어 망국의 길로 이끈 왕이었지만 그가 거문고, 바득, 서예, 그림에서 큰 성과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그는 서화에 조예가 깊어 서화의 거장으로도 불렸다. 원대 토크타 칸(脱脱)이 편찬한 <송사(宋史)>에는 송 휘종 본기(本紀)를 쓸 때 자신도 모르게 붓을 내던지며 “송 휘종은 모든 일을 잘했는데 오로지 군주로서 귀 기울이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라고 탄식했다. 


▲ 송휘종 조길 모사한 당나라 유명 화가 장원의 <괵국부인유춘도권(虢国夫人游春图卷)> / 사진출처 = 금교



회화를 과거제도와 학교제도에 편입시킨 것이 송 휘종의 일대 업적이었다. 1104년 송 휘종은 화학(畵學)을 설립했는데 이는 현재의 미술 전문학교로 천하의 화가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회화를 정식으로 ‘대학입시’ 과목에 편입시켰다. 그는 미술시험을 불도, 인물, 산수, 조수, 화죽, 옥목(집과 나무) 6과목으로 나누어 직접 시험을 주재했고 문인 시구로 시제를 내 수험생들이 이런 시구의 예술적 경지를 그려낼 것을 요구하며 누구의 구상이 기묘한지, 진부하지 않은지 등을 보았다.

한 번은 휘종이 ‘죽쇄교변매주가(竹鎖橋邊賣酒家, 대숲에 둘러싸인 술집)’를 미술시험의 제목으로 내어 수험생들이 이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많은 수험생들이 주점을 그리고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죽림을 배경으로 그렸다. 이당(李唐)만이 독특한 구성을 했는데 그가 그린 그림은 맑게 흐르는 굽은 물이 있고 작은 다리가 물 위에 가로놓였으며 다리 옆 물가에 푸르른 죽림에서 비스듬히 보이는 주기(주점임을 알리는 깃발)가 바람결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이당의 이 그림은 주점이 죽림에 가려진 ‘쇄(鎖)’ 자의 예술적 경지를 잘 표현해냈으며 송 휘종은 이 시험의 1등으로 그를 뽑았고 도화원에 채용했다. 훗날 이당도 북송의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당시 채용되어 도화원에 들어간 화가는 회화 공부 외에 <설문(說文)>, <이아(爾雅)>, <방언(方言)>, <석명(釋名)> 등 기타 교과과정을 겸해서 배워 화가의 예술적 상상력과 창작 기교를 배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송 휘종은 회화를 매우 중요시 해 미술창작의 번영에 불을 지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우수한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송 휘종 집정 시 유명 화가는 48명이었으며 양송(兩宋) 화가 수가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 그들은 많은 아름다운 회화작품을 창작해냈고 그 그림들은 황궁에 소장되었다. 훗날 이런 미술작품들은 20권의 <선화화보(宣和畵譜)>로 편성되었으며 여기에 6396점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이는 중국 고대미술사를 연구하는 주요 자료가 되었다.

◇ 가장 뛰어났던 '이카오 수험생'

과거제도는 수나라 대업원년(大業元年)에 탄생되어 청나라 광서(光緖) 30년 갑진과(甲辰科) 최후의 장원까지 모두 600여 명의 장원을 배출했다. 그 중 어떤 장원급제자는 문화과로 채용된 것이 아닌 그의 특기인 음악재능으로 급제했는데 그가 바로 당나라 유명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이다.

당대의 과거시험 시험지는 후세와 달리 '밀봉'하지 않고 시험감독관들이 그들의 추천인이 건넨 '행권(行卷)'에 따라 시험지와 서로 대조해 수험생들의 '종합소질'을 점검했다. 

'행권(行卷)'은 수험생들이 시험 전에 평소 쓰던 가장 자신만만한 시부(詩賦) 문장을 편집해 두루마리로 쓴 것으로 조정의 집권자 또는 유명인사에게 올려 그들이 주감독관에게 추천하도록 부탁하는 시험방식이다. 이는 당나라 때 수험생들 사이에서 매우 성행했다.

왕유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다재다능했으며 비파를 매우 잘 켰다. 그는 20세가 되던 해 시험을 보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갔다. 과거시험 난이도를 현재의 대입시험과 비교하면 더 어려웠으면 어려웠지 결코 쉽지 않았다.

왕유는 해보자는 마음으로 당 현종의 남동생인 기왕(岐王) 이융범(李隆範)을 찾아가 그가 추천해 줄 것을 청했다. 그래서 기왕은 그에게 태평공주(太平公主)가 개최하는 연회에서 배우로 분장해 음악을 사랑하는 태평공주에게 비파를 연주해 주어 점수를 딸 것을 제안했다. 연회에 나가기 전 왕유는 정성 들여 치장한 후 연회에서 애절한 <울륜포(郁輪袍)>를 연주했다. 태평공주는 이 재능 넘치는 왕유를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기왕은 이 때를 틈타 왕유를 공주에게 추천했고 추천서와 왕유의 시작(詩作)을 올렸다.

후세 사람들은 왕유를 높이 평가해 세간에선 '이백은 천재(天才), 두보는 지재(地才), 왕유는 인재(人才)'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왕유는 시불(詩佛)로 불리기도 한다. 왕유는 시단에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내었고 문인화의 남산지종[南山之宗, 쳰중슈(錢鐘書)는 그가 '성당화단(盛唐畵壇) 일인자'라고 일컬음]이기도 하며 음율에 전통하고 서법에 능하며 전서(篆書)로 인장을 파는 솜씨가 뛰어난 보기 드문 팔방미인이었다. 


<이 기사는 제휴매체 '금교'에서 발행한 기사입니다>

출처: 봉황망코리아 ㅣ 차이나포커스 https://goo.gl/nFNms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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