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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한중수교 25주년] 83년 중국민항기 납치사건이 국가 간 접촉 계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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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교섭 초기) 한중 양국간 국가 차원의 접촉은 1983년 민항기 납치사건이 계기가 됐다. 물론 그 이전에 관계정상화의 필요성이 중국에서도 제기되긴 했었다. 1980년 1월 덩샤오핑 주석은 현대화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주변정세의 안정과 경제발전이 필수임을 역설했다. 달라진 국가기조에서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 모델에 관심을 갖는 중국 지도자들이 부쩍 늘었고 제3국을 통한 교역은 그 해 말 1,9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외교부장 황화(黃華)의 ‘관문불상쇄(關門不上鎖·문은 잠겨 있으나 빗장은 걸지 않았다)는 한국과의 교류확대의사로 읽혀졌다. 

그러나 북한이라는 실체가 엄존한 상황에서 양측은 상호 불가촉(不可觸)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후일 한중 수교 협정에 서명한 첸지천(錢其琛)외교부장의 “1990년 초까지만 해도 한국은 중국인에게 ‘금지된 구역’이었다”는 술회는 살벌했던 당시를 짐작케 한다.


▲ 1983년 5월 중국 민간 항공기가 강원도 춘천 미군기지에 착륙했다.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 1983년 5월 중국 민간 항공기가 강원도 춘천 미군기지에 착륙했다.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이럴 즈음 1983년 5월, 91명의 승객과 9명의 승무원을 태운 중국민용항공총국(현 중국국제항공) 소속 항공기가 한국으로 납치됐다. 한국 정부는 6명이 납치한 비행기를 춘천 소재 미 육군 헬기장 캠프케이지로 불시착을 유도했다. 사건 처리를 위한 정부간 협의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과 중국 정부간 첫 공식외교 접촉이 이뤄진 것이다. 중국 정부는 당초 직접 대좌를 꺼리면서 간접교섭을 시도했으나 결국 민항총국장을 '금단(禁斷) 영역'이던 서울로 파견했다. 양국은 납치범을 대한민국 법에 의해 재판할 것과 향후 유사 사건이 발생할 때 긴밀히 협조키로 합의하는 등 9개항에 걸친 외교각서를 교환했다. 정부차원의 협조 등의 합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국호 사용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민항기 납치사건’이 관계정상화 필요성을 절감케 


▲ 1983년 5월 강원도 춘천에 불시착한 중국 민간 여객기의 탑승자들이 서울 워커힐 호텔에 도착했다.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이 당시 한국 정부는 납치된 승객들을 납치 다음날 서울로 이송, 특급호텔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출국 때는 컬러TV까지 선물했다. 당시 한국정부는 납치된 민항기·게를 줄인다며 좌석 의자를 분해하기도 했다. 만남의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이럴 만큼 중국당국과의 직접 접촉을 절실해하던 게 한국이었고 중국 역시 정부간 교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 1983년 5월 한국과 중국이 중국 민간 여객기 해결을 위한 전체 회의를 갖고 9개 항목 합의서에 서명했다.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석달 후 양국은 중국 민항기가 한국의 비행정보구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합의하는 등 부쩍 가까워 졌다. 함상 반란으로 한국 영해에 들어온 중국 잠수함을 '원만히' 돌려보낸 일도 있었고, 마약범죄자 색출을 위한 '보이지 않는' 공조도 이뤄졌다. 아무튼 '민항기 납치' 사건은 체육·문화·관광 등 비정치적인 부문의 교류를 확대· 가속화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거기까지’ 였다. 북한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중국이었고, 중국으로선 한국이 필요는 하지만 ‘절실’까지는 아닌 것으로 파악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지리적 인접성과 옌볜의 한민족들(조선족)을 비롯한 200만 조선족들이 한국을 찾으면서 인적 교류와 교역이 급속히 늘어났다. 관계정상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로 자리했다.

체육·문화 부문의 교류 증대는 양국간 수교의 촉매였다. 아직 일일이 밝힐 시점이 아니지만 민간의 역할이 컸음은 말할 수 있다. 이순석 선경(지금의 SK)사장과 장치혁 고려합섬 사장 등의 노력은 상찬할 만하다. 중국 고위층과 개인적 친분이 많은 이 사장 등의 숨은 노력이 없었다면 한중 수교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북방외교 참모장 역할을 했던 김종휘 (노태우)청와대외교안보수석이나 막후에서 활약한 이병기 의전수석 등의 일치된 증언이다. 사드로 얼어붙은 한중관계 복원을 위해서도 이처럼 청소년 합동캠프 등 민간차원 교류·협력이 긴요하다는 것.

◇86아시안·88올림픽이 결정적 기여 



▲ 1986년 아시안게임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중국·소련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과 교류하는데 최고의 호재였다. 스포츠를 목적으로 하는 만큼 접촉이 수월했고 상대도 부담이 없었을 게다.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 입성 전 서울올림픽·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지내면서 공산권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던 것도 큰 자산이었다. 최고지도자가 안면을 넓히고 국제적 감각을 갖출 기회를 많이 갖게 됐다는 얘기다. 


▲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이 88 서울 올림픽이 치러질 올림픽 주경기장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주지하듯이 우리와 국교를 맺은 첫 동구권 국가는 헝가리(1989년)다. 올림픽을 앞두고 승마 경기에 필요한 말들을 헝가리에서 대량 매입했는데 헝가리가 첫 수교 대상이 된 것과 무관치 않다. 첫 매듭이 잘 풀리면서 다른 동구권 국가, 나아가서는 소련과의 교섭도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됐다.

중국에 대해 한국과의 국교정상화가 돌이킬 수 없는 대세임을 확인시킨 한·소 국교 정상화에도 사연은 그득하다.

[봉황망코리아차이나포커스] 특별취재팀 kovap2@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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