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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한중수교 25주년] 모스크바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대통령 특사…과잉 보안·경쟁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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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외교 선두 박철언은 YS와 ‘수행-동행’ 시비후 하차

갈등 속 경쟁은 박철언과 청와대 사이에서뿐 아니라 청와대와 외무부 간에도 있었다. 청와대는 보안을 이유로 외무부를 배제시켰고, 외무부는 고유 영역에서 따돌림당한다며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 6월 4일 고르바쵸프 소련 대통령과 노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SF) 호텔에서 정상회담을 가질 때 좌석 부족 등을 이유로 수행했던 최호중 장관을 배제시키려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 1990년 최호중 외무부 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 장관 회담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최 장관은 한국 측 자리가 5석에 불과하고 소련측에서도 외무장관이 나오지 않는 다며 자신을 빼돌리려 하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현지에 온 외교총수가 빠지면 세계에 웃음거리가 된다고 우겨 가까스로 자리를 차지했다. 최 장관의 배석으로 노재봉 비서실장이 빠졌는데 최 장관은 후일 ‘청와대가 공을 독차지 하려는’ 술수라며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토로한다.

김종휘 수석도 청와대에서 밀려날 뻔했던 적이 있다. 1990년 공관장 인사 초안은 주미대사에 김종휘 수석, 주영대사에 노창희 의전수석, 주네네바대사에 이홍구 통일부 장관 등이었다. 그러나 김 수석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현홍주 의원을 주미대사로, 이홍구 장관을 주영대사로 교통정리 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소란은 김 수석을 장관급으로 승격시키면서 봉합됐다. 김 수석은 자신을 부담스러워하는 박 장관·서 부장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당시를 읽는다.

이러다 보니 각개 약진식 일처리도 비일비재했다. 형식상 주무 책임자인 외무장관이나 모스크바 현지의 공노명 영사 처장이 정상회담 1주일 전까지도 사태 진전을 까맣게 모르는 우스개도 연출됐다. 또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박 장관과 김 수석이 모스크바 호텔 로비에서 마주치는 소극까지 벌어졌다.

◇“아관파천 상기시키는 영사관은 안 돼"


▲ 1990년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양국 관계 일반 원칙 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김 수석은 이런 모습이 생긴 것은 극도의 보안에서 비롯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설명한다. 소련의 거물 도브리닌이 서울에서 열린 전직 수반 회의에 참석했다. 신라호텔에서 조용히 만났을 때 그는 노 대통령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노 대통령에게 사실을 보고하고 보안을 위해 집무실이 아닌 청와대 경내 상춘제에서 접견토록 주선했다. 

이 자리에서 고르바쵸프 대통령과의 만남이 약속됐다. 대통령과 원칙적 합의를 마친 도브르닌과 후속 절차 등 구체적 협의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다른 이의 눈에 안 띄는 장소를 찾느라 압구정동의 한적한 카페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도브리닌은 본래 고르바쵸프 대통령이 캐나다 방문 길인 알라스카에서 회담을 갖기로 한 것을 SF에서 하자고 했다. 도시를 옮기는 것은 상관없지만 문제는 SF소련 영사관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1896년 이조시대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 피신했던 아관파천이나 상기시킬지 모른다며 재고를 요청했다. 도브르닌은 김 수석 말에 수긍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도브르닌은 즉각 크렘린 궁과 전화 연결을 김 수석에게 요구했으나 당시 소련과의 전화 회선 2개에 불과해 불가했다. 경호실에 긴급 요청, 다른 통화를 중단시키고서야 도브리닌의 통화가 이뤄졌다. 다음 날 백악관과 접촉, 소련과의 정상 회남 뒤 미 대통령과의 만남을 보장 받았다. 이런 사연들이 허다했기에 때론 내부 과잉 경쟁으로 비쳤던 것이다.

박 장관과 김 수석이 모스크바 호텔에서 조우한 해프닝은 박 장관과 YS 경우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YS와 박 장관은 1990년 3월20일부터 1주일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번 방문에 앞서 박 장관은 1988년 12월 서울을 방문한 게오르기 김 소련동양학 부연구소장을 통해 고르바쵸프 대통령 앞 친서를 전달했다는 것이고 이후 소련 문제에 매달렸다. 

고르바쵸프와의 만남을 대권 가도를 다지는 계기로 삼으려는 YS역시 후일 총리가 된 프리마코프 IMEMO(세계경제·국제관계 연구소)소장(후일 소련 총리)과 긴밀하게 접촉을 해왔다. 박 장관을 ‘애송이’로 치부하는 YS와 YS를 대권 경쟁자로 상정한 두 사람이 일행이 됐으니 소리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 1995년 김영삼 대통령 고르바쵸프 전 소련 대통령 접견 당시 모습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크렘린 궁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YS는 박 장관을 따돌린 채 고르바쵸프 대통령을 만났고 박 장관은 발칵했다. 한국 대통령 친서는 자기가 챙겨와 22일 부르텐츠 소련공산당 국제부부장을 통해 전달했음에도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박 장관은 친서에 “김 최고위원과 박 장관을 통해…”로 돼있다면서 자기는 YS를 수행한 게 아니라 동행한 것인데 국제관계의 기본도 모르는 YS가 무모했다고 맹비난했다. 소위 ‘수행-동행’ 시비가 벌어졌다. 두 사람 간 갈등은 몇 달 뒤 YS를 뒷조사한 안기부 문건이 빌미가 되는 이른바 ‘노란 봉투 사건’이 계기가 돼 YS 완승으로 끝났다. 이런 우화들은 당시 북방외교가 얼마나 호재였는지를 말해주는 사례다(노 대통령을 만난 YS는 안기부 문건 들어있는 노란 봉투를 탁자에 던지며 배후인물인 박 장관을 내치지 않으면 탈당을 불사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안기부 ‘중·소팀’ 팀장이었던 염돈재 전 국정원 차장은 YS가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수교 원칙에 합의를 했다’고 전했지만 사실과 달랐다고 전한다. 어쨌거나 ‘동행’시비로 다소의 흠집은 났지만 YS는 주가를 올리는 데 일단 성공 했다.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 23층 스카이라운지 특별실에서 있은 한소정상회담에서도 적지 않은 소란이 있었다. 1시간 이상의 지연, 엘리베이터 운행을 제한하는 바람에 소련 경호원과 밀치는 소동 등등 1904년 단절된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는 고비와 곡절이 점철돼 있다. 

◇외무장관마저 뒷전에 밀릴 뻔한 SF 정상회담


▲ 1990년 최호중 외무부 장관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 장관 주재 양국 회담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여하튼 한소 수교의 최종 마무리는 SF회담 배석자에서 제외 될 뻔한 최호중 외무 장관에 의해서였다. 9월30일 유엔본부에서 만난 최 장관과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서명하는 것으로 86년 단절된 양국 관계가 이어졌다. 세바르드나제 장관은 수교에는 합의하지만 그 발효는 1991년 1월 1일로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는데 최 장관이 양국을 위해 좋은 일이며 올바른 길인데 주저하거나 뒤로 미룰 까닭이 없지 않느냐고 거듭 강조하자 선뜻 응했다. 


▲ 1990년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최 장관은 그루지야 대통령이 된 그로부터 수교 즉시 발효 동의가 ‘김일성에서 받은 푸대접’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노라고 했다. 한소수교 10년이 지난 뒤 그루지야를 방문, 수교 당시의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자 수교협상 당시 ‘왜 자기가 내 주장을 받아들였는지 설명해 주겠다’면서 한국과 수교하기로 한 사정을 설명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말할 수 없는 푸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지 못한 것은 물론 협박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불끈하는 마음에 내 주장을 받아들이고 만 것이라면서 껄껄 웃었다. 최 장관의 해석처럼 과장된 표현인지 모르나 ‘관계’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봉황망코리아차이나포커스] 특별취재팀 kovap2@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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