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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전국(战国)시대 화끈한 투자자… ‘킹 메이커’ 여불위(吕不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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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불위(吕不韦) 초상화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여불위(吕不韦,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35년)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조(赵)나라 출신의 거상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젊을 때부터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특이한 점으로는 ‘킹 메이커로’서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 진시황(秦始皇)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을 왕위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해 권세를 잡았던 인물이다.


여불위는 어려서부터 상(商)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배웠다. 그의 아버지 여충의(吕忠义)는 위나라 성내에서 진귀한 한약재를 파는 유명한 상인이었다. 장사에 남다른 식견을 가진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번창시켜 젊은 나이에 조(赵)나라 수도 한단(邯郸)에서 갑부가 되었다.

역사 실록에는 “여불위는 장사의 귀재로 모든 상품의 시기성을 적절히 따져 가격이 쌀 때 사들이고 비쌀 때 내다 팔아 천금을 모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그의 일생에서 천금을 모은 것 보다 더 위대한 사업은 조(赵)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영이인(赢异人, 훗날 진나라 장양왕)을 도와 귀국시켜 왕위에 오르게 하고 개인적으로는 상인에서 정치가로서의 역사적 변환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것이다.

여불위가 조나라에서 한창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우연한 계기로 조나라에 인질로 있던 진나라 공자 이인(异人)을 만나게 됐다. 여불위는 이인과 자주 어울리면서 그의 리더십과 패기를 높이 평가하고 “투자할 만한 상품”으로 생각했다. 여불위는 이인과 관계를 잘 맺어 나중에 그를 통한 “나라 사업”을 거창히 할 계획을 차근차근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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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양왕(庄襄王)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이인과의 관계가 깊어질 무렵 어느 날,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여불위는 아버지께 농업의 이윤이 얼마인지를 물었다. 그의 아버지는 “10배”라고 말했다. 이어 한약재나 보석 장사를 하면 이윤이 얼마인지를 물었다. 아버지는 “100”배라고 대답했다. 여불위는 마지막으로 “제가 만약 황제를 옹립해서 나라를 세우면 이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의 아버지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란 듯 한참을 생각하다가 “만약 그렇게 할 수 만 있다면 이윤은 천 배, 만 배, 아니 금전적 가치는 아무도 계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버지의 대답을 들은 여불위는 즉시 자신의 창고로 달려가 진귀한 식재료로 유명한 영지버섯 300근과 일부 보석을 챙겨 서둘러 진나라로 떠났다. 진나라에 도착한 여불위는 당시 안국군의 총애를 받던 화양부인(华阳夫人)에게 영지 100근과 보석을 바치고 진나라 대신(大臣) 4명에게 영지 50근을 고루 나눠주면서 이인을 진나라의 태자로 옹립해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절반에 육박하는 자신의 재산을 때어 정치적 로비를 펼친 그는 ‘나라 사업’에 사활을 걸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로비를 마치고 한단으로 돌아온 여불위는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행동으로 옮겼다. 우선 조나라의 대신을 매수해 이인을 자신의 집에 두고 보호했고 임신한 자신의 애첩 조희(趙姬)를 딸로 꾸며 이인에게 시집을 보냈다. 또한 이인의 이름을 자초(子楚)로 개명하고 조나라 경계병들에게 뇌물을 줘 몰래 진나라로 빠져나가게 했다.

하늘도 여불위의 계획을 도왔다. 기원전 251년, 진나라 왕위를 계승한 안국군(安国君)은 화양부인을 왕후로, 자초를 태자로 삼았지만 왕관을 쓴지 3일 만에 갑자기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초가 왕위를 계승해 장양왕(庄襄王)으로 왕좌에 올랐다. 여불위가 오랜 시간 공들여 야심차게 준비한 ‘나라 사업’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기원전 249년, 장양왕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 여불위를 *승상(丞相)으로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로 봉했다. 또한 남전(蓝田, 오늘날의 섬서(陕西)성) 12개 현을 녹봉으로 하사했다. 여불위의 ‘나라 사업’은 그의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금전적 이윤은 천만 배 이상으로 가치로 계산 할 수 없는 재산을 얻게 됐다.
(*승상 :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천자(天子)를 보필하던 최고관직으로 한국의 정승(政丞)과 같다.)

‘킹 메이커’의 일등 공신 여불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어린시절부터 여불위와 가까이 지낸 진시황은 그를 중보(仲父)라고 부르며 아버지처럼 떠받들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진나라의 모든 정책과 실권은 여불위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었다.

천수를 누릴 줄 알았던 장양왕은 집권한지 불과 3년만에 병사했다. 후계자로는 여불위가 친조카처럼 아끼던 당시 태자 신분인 진시황이 낙점돼 진나라 황제의 명맥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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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秦始皇)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13세의 어린나이에 즉위 한 진시황 대신 섭정을 한 여불위는 굵직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조정의 대권을 쥐고 노애(嫪毐) 등과 도모하여 위(卫) 나라에 군사를 보내고 조나라와 위(魏)나라의 여러 성을 점령했다. 또한 서쪽으로는 삼천(三川)을 점령하고 북쪽으로는 여러 개의 군(郡)을 세웠다.

여불위는 낙양, 남양(南阳), 신양(信阳), 복양(濮阳), 양책 등에 군을 세우고 급속히 영토를 확장했다. 여불위의 이러한 업적들은 훗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기반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진시황이 장성한 뒤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자, 자신의 강력한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여불위를 가장 먼저 제거해버렸다. 그는 자신의 모친인 태후와 간통한 노애(嫪毐)가 일으킨 반란 사건을 빌미 삼아 여불위의 모든 봉호와 작록을 삭탈했다.

일반인이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큰 죄였지만 자신의 선친인 장양왕을 도와 황제로 만들어준 공이 인정돼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다. 여불위는 촉나라의 척박한 땅으로 추방됐다. 또한 진시황은 그가 알고 지내던 제후와 지인들에게 “여불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엄포를 놓아 여불위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귀양살이를 했다.

천하최고의 권력가에서 어느 한곳 발 붙일 땅조차 없게 된 여불위는 크게 낙담했다. 기원전 235년, 촉나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결국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윤이현 기자 yoon@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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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차이나포커스 http://chinafocus.mk.co.kr/view.php?no=465&categorycode=3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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