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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위챗은 라이프스타일이다" 텐센트 부총재 '장샤오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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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샤오룽(张小龙) 텐센트 부총재 ⓒ 봉황망(凤凰网)


Foxmail로 메일을 보내본 적이 없어도 QQ우편함의 표류병(漂流瓶∙불특정 다수에게 메시지 전송)은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표류병을 해본 적이 없어도 위챗은 알 것이다. 이 3가지 소프트웨어 배후에는 텐센트의 장샤오룽(张小龙) 부총재가 있다. 그가 이 제품들을 바탕으로 창출한 상업 가치는 어떤 비즈니스 리더가 내놓은 것과 비교해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업무 시간을 ‘예술가’로서 활동하는 장샤오룽은 제품을 자신이 창작한 예술작품으로 여기며 온 정성을 쏟는다.

◇ Foxmail의 창시자

1994년 가을 만 24세였던 장샤오룽은 화중과기대학 대학원 졸업 후 공공기관인 전신기관에 취직했다. 소위 평생직장으로 불리던 그의 직업을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했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정부기관 빌딩을 볼 때마다 답답함을 느꼈던 그는 돌연 사직서를 내고 인터넷 업종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초기 인터넷 창업자들 대다수는 한 분야를 선택해 제품을 만들었다. 예컨대 현재 텐센트그룹의 회장 마화텅(马化腾)은 소셜 소프트웨어 큐큐(QQ)를, 바이두의 리옌훙(李彦宏)은 검색엔진을 선택했다. 장샤오룽의 시작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오직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해 Foxmail 소프트웨어를 개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Foxmail 클라이언트 단말 소프트웨어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프트웨어로 중문 버전 사용자 수가 400만 명을 넘었고 영문버전의 사용자는 20여 개국에 분포해 있다. 

1997년 Foxmail을 선보인 그는 2000년까지 3개의 업데이트버전을 내놨다. 당시 Foxmail 사용자 수는 200만 명에 달했는데 텐센트가 그때 10만 명의 사용자 수를 보유한 것과 비교하면 결코 작지 않은 규모다. Foxmail은 유일하게 마이크로소프트(MS) Outlook에 대항하는 메일 소프트웨어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Foxmail의 지명도는 장샤오룽에게 어떠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오직 흥미로만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Foxmail의 유지∙업그레이드가 점점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장샤오룽은 Foxmail을 한 인터넷 회사에 팔았다. 매각 소식이 발표된 날 저녁 그는 슬픔에 잠긴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Foxmail을 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예술작품으로 비유했다.

◇ QQ메일에 새 생명 부여

Foxmail을 인수한 회사는 2005년 몰락을 길을 걷고 있었다. 이 회사는 어쩔 수 없이 Foxmail을 텐센트에 양도했다. 장샤오룽도 텐센트 광저우 연구개발부 최고책임자로 입사해 새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텐센트는 대내외 치열한 경쟁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텐센트가 내놓은 메일 소프트웨어는 마화텅 회장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할 정도로 수준이 떨어졌다. 

장샤오룽이 QQ메일 사업을 맡았던 초기에는 MSN과 Gmail을 무턱대고 모방해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전략을 빠르게 바꿔 나갔다. 당시 대부분 메일은 대용량 첨부파일을 아예 보내지 못하거나 전송되더라도 속도가 매우 느려 이용자의 업무에 큰 불편을 초래했다. 이러한 수요를 겨냥해 QQ메일은 초대형 첨부파일 전송을 2G까지 지원했다.

이 개혁은 많은 휴면고객을 활성화시켰고 QQ메일 사용자 수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2년 뒤 QQ메일은 새 생명을 얻었고 텐센트 칠성급 제품이란 영예를 얻었다.

하지만 QQ메일의 성공에 장샤오룽은 오히려 초초함을 느꼈다. 그 당시 메일은 대다수 일반 네티즌들에게 여전히 문턱이 높은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2010년 9월 장샤오룽은 다시 QQ표류병을 출시했다. 대다수 사람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고독감을 포착한 QQ표류병은 낯선 사람들과 친구 사귀기 방식으로 사용자들에게 참신한 사교 루트와 신기한 체험을 제공했다. 그 결과 출시된 지 얼마 안 돼 1일 발송량이 1억 회로 가까이 급속 증가했고 QQ메일은 중국 1위의 메일 소프트웨어로 등극했다.

◇ 24년 만에 창업 꿈 실현



▲ 장샤오룽(张小龙) 텐센트 부총재 ⓒ 봉황망(凤凰网)




2010년 10월 Kik라는 모바일 기반 무료 메시지 채팅 소프트웨어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소프트웨어는 출시 15일 만에 사용자 수 100만 명에 육박했다. 이에 장샤오룽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모바일 인터넷이 앞으로 새로운 통신수단이 되고 QQ에도 큰 위협이 될 것으로 여겼다. 그는 마화텅 회장에게 메일 한 통을 보내 텐센트가 모바일 소설 소프트웨어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 메일이 위챗의 시작이 됐다.

당시 텐센트 내부의 3개 팀이 위챗과 비슷한 제품을 개발하고 있었지만 운영업체와의 이해관계가 깨질까 두려워해 프로젝트를 잠시 미뤄둔 상태였다. 장샤오룽은 이에 개의치 않고 개발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장샤오룽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절대 타협하지 않고 팀 전체와 함께 밤낮으로 개발에 매달렸다. 

2011년 1월 21일 위챗1.0이 정식으로 오픈됐다. 하지만 사용자 수가 생각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장샤오룽은 돌연 위챗이 지나치게 이성적이지 않은가 의식하고는 문화예술 또는 휴머니즘 요소를 가미하기로 결정했다. 

위챗은 인간의 감성에 더욱 다가가는 기능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근처에 있는 사람 찾기, 모멘트, 흔들기 등이다. 새롭게 바뀐 위챗은 8개월 만에 전체 시장을 휩쓸었다.

위챗2.5 발표 전날, 장샤오룽은 텐센트 부총재로 임명됐다. 입사 후 6년 만의 일이다. 

지난해 말 기준 위챗의 월간 활성 사용자 수(MAU)는 9억3800만 명을 돌파했다.

제휴매체 중국 ‘금교(金桥)’ 정리: 권선아 중국 전문 기자 sun.k@ifeng.co.kr

 출처: 봉황망코리아 ㅣ 차이나포커스 https://goo.gl/tpQW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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