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호설암(胡雪岩)은 두 귀인을 만나면서 중국 봉건사회의 마지막 위대한 상인이 됐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호설암(1823년~ 1885년)은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청나라 거상(巨商)이다. 상인이라는 신분으로 유일하게 모자에 붉은 산호를 달 수 있는 관직을 받아 홍정상인(红顶商人)으로 불렸다.
▲ 좌종당(左宗棠)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호설암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다. 안후이(安徽) 후이저우(徽州)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전장(錢莊, 은행과 같은 사설 금융 기관)에서 일을 했다. 15세가 되던 해 유학자 왕유령(王有龄)을 만나 호설암의 인생은 달라졌다. 호설암은 왕유령이 벼슬에 오를 수 있게 도와줬다. 이후 호설암은 왕유령과 결탁해 국가의 재산을 빼돌려 사업을 확장했다. 훗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러 항저우(杭州)로 온 좌종당(左宗棠)과 만난 후 승승장구 했다. 좌종당은 후난성 출신의 정치가이자 증국번(曾国藩)이 거느린 상군(湘軍)의 실질적 지휘자였다. 호설암은 좌종당에게 아낌없이 군량미와 무기를 바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한몫을 했다. 좌종당이 정치세력을 확장할수록 호설암도 더 큰 부를 누리게 됐다. 이 때부터 호설암은 서양 상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중국은 물론, 국제 무역에도 뛰어들기 시작했다. 좌종당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최대 공헌자로 호설암을 지목했다. 그 결과 호설암은 상인 신분에 불구하고 1품 관직인 홍정상인 직위에 올랐다.
▲ 이홍장(李鸿章)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호설암은 그가 보여준 뛰어난 상인의 자질 덕분에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인물 중 하나다.
▲ 호설암(胡雪岩)의 고택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항저우에는 호설암을 기리는 고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호설암이 13명의 부인과 함께 살았던 호설암 고택은 중국의 주요 문화재로 선정됐다.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최예지 기자 rz@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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