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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發 중국이야기

[한중수교 25주년] 한중수교 당시 상황을 보다....김종휘 당시 청와대 안보수석 인터뷰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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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위기(累卵危機)라는 단어가 실감나는 때다. 북한 핵·미사일 발사시험과 여기서 비롯한 사드(THAAD) 배치, 그리고 이어지는 한중 갈등 사태는 한반도로 초긴장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국가 초비상 사태에 즈음, 1991년 남북비핵화 공동선언과 1992년 한·중수교 입안자(architect)였던 김종휘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만났다. 


▲ 1992년 한중수교 당시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종휘 전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율곡비리에 관련됐다는 보도를 좀처럼 믿으려하지 않는다. 감사원의 공식감사 결과가 나오면 진위가 밝혀지겠지만 적어도 평소 노태우 전 대통령 참모로서 그의 언행은 '착한' 또는 '깨끗한' 편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는 청와대 수석으로 노 전 대통령과 5년을 꼬박같이 지낸 유일한 참모다. 외모부터가 마음씨 좋은 시골국민학교 교장타입이고 업무를 통해 전혀 설치거나 마찰을 빚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골프도 안하고 이른바 '교제술'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

평양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경기고 졸업후 미 컬럼비아대에 유학,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62년 국방대학원 교수로 귀국,30년간 군사전략·한반도 안보문제를 강의했고 안보문제 연구소장으로 일하던 중 노 정부출범과 함께 외교안보보좌관(나중에 외교안보 수석으로 개칭)이 됐었다.

학자지만 줄곧 국방부와 인연을 맺어 안보현실과 전략에 비교적 감각이 있다는 평을 들었으며 초기 박철언씨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북방정책을 주도해 구소련·중국과의 수교를 이뤄냈다.

그는 평소 군인사·방위산업 등이 소관분야임에도 오해나 잡음의 소지가 있다며 가급적 직접개입을 피해왔다고 함께 일한 청와대 비서관들은 증언하고 있다. 그는 특히 '하나회' 중심으로 군인사 인맥이 형성된데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되도록 빨리 문민 국방장관시대가 와야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의 계좌에서 뭉칫돈이 나왔다는 얘기에 "뭔가 잘못됐을 것"이라며 "혹시 노 전 대통령이 퇴임전에 준 촌지 등을 순진하게 그대로 입금시킨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 청와대 비서관은 그가 F16기로 기종 환원을 결정할 즈음 미 GD사 대표의 면담을 거절한 것은 물론 결정 이후에도 공연한 의심을 받을 필요가 없다며 사절했다고 전했다.

물론 이런 행태를 조사결과에 따라서는 "내숭 떨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와 감사원 관계자들은 "김 수석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조심했다 하더라도 매년 2조9천억원을 지출하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운명적"이라는 말로 상당액의 뭉칫돈이 자동적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떡장수가 떡고물을 만지지 않고 어떻게 장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문제의 뭉칫돈 정체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김씨 본인은 물론 노 전 대통령과 6공은 만신창이가 될수밖에 없다. 6공 외교·안보를 주무른 그는 김종인 전 경제수석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의 속죄양이 될지도 모른다.

김영삼(YS) 정부 출범 100일 무렵인 1993년 6월8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율곡사업 특감 기사다. 작성자는 당시 청와대를 담당하던 중앙일보 김현일 차장. 바로 지금의 인터뷰를 한 본인이다. 미리 얘기하건대 25년 전 ‘김 차장’의 기사는 사실과 근접한다.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이 언제 타계할지도 모를 상태에서 병석에 누워있고 외교상 분란 우려도 있기에 다 까발리지는 않지만 김 전 수석이 ‘검은 돈’과 무관하다는 정도는 거들 수 있다. 

한중 25년 전야를 회고하기 앞서 스무 해가 넘은 중앙일보 기사를 그대로 전재한 소이도 이런데 있다. 그저 한 마디 더 언급하다면 과거 대통령들은 청와대를 떠나는 비서관 이상 참모들에게 수 천만원(때론 그 이상)의 전별금을 주는 관례가 있었다는 것. 또 다른 한 가지 군용수송기 도입과 관련한 스캔들이 있는데 이는 ‘스포츠 외교’의 대가로 보면 된다. 일반에서는 하필이면 스페인CASA와 인도네시아IPTN이 제작한 CN-235기를 도입하는 것을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봤었다. 하필이면 검증도 안 된 ‘중진국’제를 사들일 이유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1980년대 국제스포츠계의 제왕 사마란치 IOC위원장에 대한 ‘선물’로 치부하면 과히 틀리지 않는다. CASA는 사마란치 위원장의 스페인 고향 동네에 있는 항공기 제조회사다.

그는 외교안보수석으로서 5년간의 헌신이 뇌물스캔들에 파묻혀 버린 이래 외부에 일절 나타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인터뷰에 응한 것은 “위기의 한반도와 한중 관계 재정립을 위해 고견을 듣고 싶다”는 강력한 권유를 받아들여서다. 거동이 불편한 그였으나 YS정부 이전의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청와대를 담당했던 ‘옛 지인, 김 차장’과 2시간동안 당시를 회고했다.


▲ 1992년 한중수교 당시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Q.수석에서 물러난 뒤 곤욕을 치렀는데…군·외무부 인사나 군납 등에 초연했다는 많은 증언을 들은 만큼 과거지사는 굳이 묻지 않겠다. 북방외교의 기획·연출가로서, 특히 고비를 맞은·한중 수교와 북한 핵·미사일 사태를 바라보면서 할 말이 많을 듯하다.
안타깝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꼬일 대로 꼬여 해법이 마땅치도 않고….

Q.그래도 헤쳐 나가야 하지 않겠나. 국가 이익, 아니 국민의 안녕과 국가 생존을 위해서라도.
원칙 없이 외교를 펴온 게 실책이다.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기에 더욱 심각하다.

Q.현실적으로 처방이 없다는 얘긴가. 내놓고 말하지 않지만 일각에선 북한의 regime change(정권교체)가 궁극적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 내용을 내가 언급하면 이로울 게 없을 듯하다. 다만 이 말은 꼭 해두고 싶다. 어려울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우선 우리 자세부터 다듬을 필요가 있다. 종합적·선제적 접근이 긴요하다. 바른 시각을 지닌 대통령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추진해야한다. 민족자존을 강조하되 감성적 자존은 곤란하다. 상대와의 신뢰를 쌓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약소국에게 특히 중요하다. 국민과 상대를 헷갈리게 만들고 나아가 상대에게 배신감이나 안겨서는 곤란하다 (김 수석은 6공 들어서야 정무수석 산하의 외교, 행정수석 산하의 국방, 안기부가 떠맡던 통일 업무를 외교안보수석실로 일원화했다며 외교안보에 관한한 대통령 중심의 체계적 정책 입안과 추진을 역설했다. 시대흐름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마련이라는 것. 특히 우방과는 물론 상대국의 약속·신의를 저버려서는 결코 안 된다고 했다. 김 수석은 ‘원론적’ 답변을 통해 과거 우리 정부 정책을 평가하고 현 정부의 대처 자세와 방향을 암시했다).

Q.너무 원론적이다. 
지금은 당연시 되지만 미군 용산 기지 이전은 당시로서는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컸다. 그래서 미국 지도자들을 먼저 설득했다. 주한 미대사와 8군사령관에게 ‘이 비좁은 서울 땅 한 복판에서 골프를 즐기는 모습이 다수 한국민들에게 어찌 비칠지를 생각해보라’고 했더니 금새 알아채더라. 스페인 케이스(기지이전을 거부하다가 대체 용지를 못 구해 허덕였던)를 절감하는 그들이기에 본국 정부를 나서서 설득해줬다.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추진할 때 우리의 핵사찰 능력이 어림없다며 난색을 표했을 때도 그랬다. 한국의 유능한 전문가 실력을 직접 확인시켰더니 이의 제기를 멈췄다. 지금은 위상이 달라졌다지만 주미 한국대사는 미국무부 국장급도 만나기 급급한데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대통령을 어렵사리 면담한다. 중국의 경우는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다. 그게 대한민국이다. 감상적 구호나 외칠 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때론 기다리면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사태가 불거지기 전 상대가 납득할 논리를 갖고 이해를 구하면 난제도 풀어갈 수 있다는 지적이다).

Q.선제적 접근과 ‘기다림’은 모순처럼 들린다.
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추진하면서 주한미군의 전술핵이 이슈가 됐다. 당시 미소간에 군축협상이 타결됐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도 시간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먼저 제기한 것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이 우리 대통령에게 핵무기 현황을 소상히 보고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원체 민감한 내용이라 통역도 수석인 내가 직접했다. 때문에 북한과 공동선언 채택과 관련해 한·미간에 잡음이 없었다. 전시작전권 문제 등도 마찬가지다. 중국과 수교에서는 ‘기다림’도 중요했다. 우리가 중국과의 수교를 얼마나 간구했는지는 다 알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 등을 의식해 차일피일했다. 우리가 기다리니 중국이 다가왔다. 서울에서 열린 국제회담 때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이 우리 대통령 면담을 요청, 비밀리에 면담했다. 이듬 해 5월 첸지천 부장이 공식 수교를 위한 실무회담을 제의했는데 우리가 조급을 떨었다면 훨씬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Q.대통령이 중심이 된 일사불란한 정책추진을 강조하는데, 역대 대통령들의 ‘폭탄 돌리기 게임’식 대북 정책이 오늘의 황당한 상황을 초래하지 않았는가. 내 임기 동안만 넘기면 된다는 투의-.
최고지도자가 올바른 세계관을 갖고 흐름을 읽도록 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외교안보에서 혼선은 용납되지 않기에 더욱 그러하다.

Q.김 수석이 활동할 때도 박철언 체육장관, 외무부·안기부와의 엇박자가 심심치 않았다. 그게 공 다툼이건, 충성경쟁이건….
어느 정부에서도 가능한 상황이다. 때문에 대통령의 역할, 지도력이 중요하다. 박철언 청와대정책보좌관과 내가 모스크바의 한 호텔에서 조우한 것을 말하는 모양인데 실상은 이렇다. 나나 박철언 보좌관이 88올림픽 전 대통령의 밀명을 받고 소련에 간 것은 틀림없다. 이는 비선(秘線)이 다른데서 기인한 것이므로 따로 놀았다는 식의 비판은 적합하지 않다. 다소의 경쟁적 시도가 있었음은 굳이 부인하지 않으나-. 하기야 나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측에서 나를 미국 대사로 빼돌리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으니 이런저런 소리가 나올 만하다.

Q.한·중 수교보다 한·소 수교를 먼저 했다. 
중국과 먼저 수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소련과의 수교가 먼저 이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시급성에서 북한의 무기체계가 중국이 아닌 소련인 것도 한 이유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북한에 근접한데다 지도부가 김일성과 더 가깝기에 시일이 더 소요되리라고 봤다. 소련이 한국과의 경제협력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소련과 국교정상화가 이뤄지면 중국도 따라 오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Q.예상보다 빠른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은 어떻게 가능했나
주미 소련대사를 30년 동안이나 지낸 도브리닌 (고르바쵸프)대통령 수석외교보좌관을 통해서 이뤄졌다. 그는 90년 전직 수반회의 참석을 구실로 5월22일 서울에 들어와 노대통령을 극비리에 만났다. 그는 한·소 정상회담에 동의한다는 고르바쵸프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Q.미국·일본 정부에는 미리 알려줬나. 
미국 땅에서 정상회담을 하니까 당연히 알려줬다.. 2~3년 뒤에나 가능하다고 관망하던 솔로몬 미국무부차관보는 놀라워했다. 일본에는 미리 알리지 않았다. 일본과 북방도서 반환 협상이 걸려 있던 소련과의 약속이 있어서다.

Q.YS정부 시절 율곡사업 스캔들로 고생을 했다. 한 전직 고위 관계자는 92년 대선 과정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불리한 ‘모종의 요청’을 해달라는 YS후보의 부탁을 김 수석이 거절한데 따른 것이라고 하더라. 다른 이는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건의하면서 김대중씨 사면·복권을 함께 주장한 게 탈이 됐다고도 하고.
노 대통령의 특명을 마무리 하고 모스크바에서 파리에 도착했다(서울-모스크바 직항편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 그때 포루투칼 대사이던 유혁인 (박정희 정부시절)정무수석과 통화했더니 파리로 날아왔다. 국내정세를 토론하던 중 유 대사에게 노 대통령과 YS간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노 대통령이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을 제일 먼저 자신에게 건의한 사람이 나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외교안보와는 무관한 국내정치 문제를 내게 묻곤 했고 나는 사심없이 내 생각을 진언했는데 출국 전에도 유사한 자리가 있었다. ‘YS와 직접 담판할 적당한 계기가 필요하다’는 유 대사와 이런 대화를 나눈 것도 그래서다. YS와 특별한 관계에 있던 유 대사는 얼마 뒤 귀국, 노 대통령과 YS간 직접 대좌 기회를 만들었고 이후 중재역을 확실하게 수행했다. 가설이지만 유 대사가 아니었다면 민정당의 민주·공화 3당 합당이 아니라 민정·평민 2당 합당이 돼 한국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YS와의 불화설은 이것으로 대신하겠다.

김 전 수석은 인터뷰에서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시절의 한·미, 한·소, 한·중간 얽힌 숱한 비화를 털어놨다. ‘공작(工作)’으로 불리는 은밀한 대목도 상당했다. 김 전 수석은 그러면서 이 어지럽고 예민한 시점에 공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보도자제를 요청했다. 따라서 일부 내용만 한중수교 25주년 특집에 반영했음을 밝혀둔다. 

김종휘 약력
1935년 생. 경기고 졸업. 미국 베이츠대·컬럼비아 대학원 졸. 1965~88국방대학원 교수. 1988~91 청와대 외교안보보좌관. 1990~91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1991~93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 

[봉황망코리아차이나포커스] 특별취재팀 kovap2@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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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봉황망코리아 ㅣ 차이나포커스 https://goo.gl/QWGq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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